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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음

엄마라는 말

정한아 에디터 박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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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기질이 순하고, 건강한 아기였다. 잘 먹고, 잘 놀고, 자리에 눕혀 놓으면 저 혼자 발을 잡고 뒹굴뒹굴하다 잠들었다. 그 애가 처음 했던 말은 ‘어바!’였다. 침을 가득 묻힌 얼굴로 방긋방긋 웃으며, 그 애는 나를 향해 시도 때도 없이 ‘어바!’라고 외쳤다. 어설픈 발음처럼 아이의 욕구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것이었다. 나는 엄마로서 모든 게 부족하고 서툴렀지만, 아이는 그 사실을 몰랐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우리의 황금기였다. 아이가 아직 말을 할 줄 몰랐을 때, 우리의 세상이 분리되지 않은 채 반짝이는 베일에 둘러싸여 있었을 때.

올해 네 살이 된 딸은 이제 또렷한 목소리로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다. 좋아하는 친구와 헤어질 때 “네 마음속에 내가 있을 거야”라고 속삭이기도 하고, 과속하는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조금만 천천히 가요”라고 항의하기도 하고, 사탕을 못 먹게 하는 아빠에게 “한 개, 딱 한 개만!”이라고 사정하기도 한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은 마치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아이의 눈을 가리던 희부연 미명이 걷히고, 사물의 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애를 속이거나, 거짓으로 엉너리 칠 수 없다.
매일 아침 내가 집을 나올 때, 딸은 현관까지 따라 나선다. 그 애는 전처럼 울거나 떼를 쓰는 대신 내게 “늦게 오지 말라”고 말한다. 아이는 알고 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작업실에 나간다는 것을, 그곳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모든 힘을 소진한 뒤에야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종종 집에 와서도 멍한 생각에 빠져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는 절반의 절망과 절반의 희망이 담긴 목소리로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말끝이 희미하게 솟아올라, 마치 뭔가를 묻는 것 같다.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다. 엄마라고 불릴 때, 나는 나 자신이 한없이 강하고, 또 무력하다고 느낀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존재, ‘나의 엄마’로 회귀한 나 자신을 본다. 사랑과 분노라는 모순된 두 감정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이의 맑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완전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우며, 즉각적인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 글을 쓰는 일이 나를 간신히 지탱시키지만, 일이 잘되지 않을 때는 모든 의욕과 기쁨을 잃어버린다. 그 틈에서 아이는 외톨이처럼 홀로 남겨진다.
아이에게 이 모든 것을 납득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솔직해질 수는 있다. 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말한다. 매일 아이 곁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길고 긴 이야기를 쓰는 나의 일에 대해서, 그 일의 고단함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에 대해서. 아이는 내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은 기묘한 대화 같다. 나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아이의 몸을 끌어안는다.
“그렇게 꽉 안지 마, 숨 막히잖아.” 아이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아이는 곧 훌쩍 자라서 내 품을 떠날 것이다. ‘이별’ ‘좌절’ ‘상처’ ‘허무’ ‘고통’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은 소문이 아닌 실체이며, ‘사랑’ ‘희생’ ‘자비’, 그런 아름다운 말들은 먼 곳의 별처럼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말이 우리가 상실한 것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이는 나를 증오하겠지만, 결국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그러했듯이.

해가 뜨기 전,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오래된 나의 습관이다. 남편과 아이가 아직 잠든 시간, 나는 캄캄한 거실로 나온다. 그곳에 완전한 정적과 암흑이 있다. 근사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영감이 떠오를 것 같은 순간이 된다. 그때 적막 속에서 가느다란 부름이 들린다.
“엄마.”
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다. 아이는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나를 찾는다. 추위에 온기를 찾듯, 갈증에 물을 찾듯,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나는 절반은 거부하고, 절반은 순응하면서 아이에게 간다. 눈도 뜨지 못한 아이가 뭐라 중얼거리며 거친 숨을 내쉰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이의 옆에 몸을 웅크린다. 창밖에 조금씩 푸른 기운이 서리더니 서서히 주위가 밝아진다. 빛이 스며드는 방 안에서 나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텅 빈 채로, 생생히 깨어, 아이의 숨소리가 편안해질 때까지.







정한아
 

소설가.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 대산대학문학상을, 2007년 장편소설 <달의 바다>로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리틀 시카고> <나를 위해 웃다> <애니> 등이 있다.

2016.09.23 오전 12:00:00
마이폴라닷컴 제공